서평(BookReview

<다시 피어날 미지의 내 삶을 위한 경배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olivi 2021. 2. 17.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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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유명한 소설들은 이상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걸까? 그들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집중하고 그들의 사고는 쉽사리 이해하기도 힘들다. 이것은 현실 세상의 금기에 대한 반항인 것인가. 숨겨진 인간의 욕망인 것인가. 작가는 모든 것이 허락된 허구의 세상 속에서 끈 풀린 망아지마냥 펜촉을 풀어헤친다.

 

인간의 저변에 깔려있는 죽음에 대한 욕망을 끄집어 내주는 자살안내자라는 톡특한 주인공을 내세운 이 소설은 출간당시에 자살을 부추기고 그 사람들을 대변해 주는 책 인가하는 논란도 있었겠다.

 

삶이 무료한 사람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거나 찾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봤을 것이다. 쉬쉬하지만 이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능일지 모른다. 꿈을 찾아 헤매 본 사람이라면...,

누구보다 별빛 같이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 꿈을 쫒던 사람이 그 꿈을 이룬 순간 혹은 그 꿈을 잃어버린 순간 죽음을 택하는 것.

깜박깜박 유난히 아름다워 보이는 그 별이 실은 사멸하는 순간이라는 걸 알았을 때 느꼈던 복잡 미묘한 감정.

 

'태어나고 사그라드는 자연의 섭리는 가까이서 보면 원(circle)같고 멀리서 보면 점(dot)같다. 시작과 끝이 만나는 지점, 삶과 죽음은 그렇게 함께 있다.'  -올리비-

 

자연발생학적으로 볼 때, 내가 나의 탄생을 선택할 수 없지만 자살은 선택할 수 있다. 나의 탄생을 막을 수 없지만 자살은 막을 수 있다.

선택가능성. 모든 선택은 책임을 동반해야한다고 흔히 말한다. 책임질 수 있다면 선택을 하지 말라 누가 옥죌 수 있을까. 그런데 자기 살해로 어떻게 자신의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책임질 주체가 사라지는데 말이다.

책에서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 무료한 사람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 삶의 무게, 책임감에 짓눌려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선택에 자살에 대한 책임감 따위는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평소 너무 큰 책임감을 안고 살아온 사람들이 택하는 게 자살이라는 점에서 이들에게 자기 죽음에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게 맞는 것인가 의문스럽다.

 


 

자살할 권리라는 신선한 충격적 확언에 답이 없는 질문만 꼬리를 물고 가다보니 작가가 그림 <사르다나팔의 죽음>과 같이 자살을 바라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르다나팔의 죽음>. 성도의 함락을 눈앞에 둔 바빌로니아의 왕이 무사들을 시켜 그의 왕비와 애첩들을 살해하는 장면이다. -중략- 같은 소재를 삼류 화가가 그렸다면 아마도 사르다나팔이 자기 머리를 두 팔로 감싸며 비통해하는 것으로 묘사했을 것이다.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

 

 

삼류 작가가 썼다면 두려움, 무서움으로 묘사했을 그것을 권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의 시선이 부럽다.

 

 

삶은 아이러니 투성이다. 김영하 작가의 등단작, 작가는 자기를 파괴할 권리를 내세운 이 글을 쓰며 자신을 사랑할 권리, 자신을 믿어줄 권리를 느꼈을 것이다.

 

 

올리비: "개명했어요. 제 이름 제가 만들었어요. 책보고."

H: "우와, 멋있어요. 올리비씨 인생을 올리비씨가 만들어가네요."

 

그저 흘러가는 대로 순응하며 살던 내 인생이 삐그덕거린 건 그때부터였을까. (아니 실은 그 이전부터.) 나를 찾으라 아우성치는 메아리에 답을 못하고 헤매는 나를 우주는 도와주는 것일까. 나는 내 삶을 스스로 개척하기로 했다. 그리곤 내 삶을 책임져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 삐거덕거리던 의자는 수레가 되고 수레는 다시 처마가 되고...

 

 

앞으로 꽃피고 꺽이고 다시 피어날 미지의 내 삶을 위해 경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