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일기(GrowthDiary

<인간은 왜 '죽음'의 문제에 천착하는가>

olivi 2021. 7. 6.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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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다가 유명한 소설은 꼭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을 발견한다. 작가는 왜 '죽음'의 키워드를 선택했고, 나는 왜 '죽음'의 키워드를 절실히 받아들이는가..하는 생각을 하다가...

 

 

<인간은 왜 '죽음'의 문제에 천착하는가>

언제 어디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것일까? 그건 근본적인 이유가 되지 못하는 듯하다.

 

내가 나의 삶과 미래에 대해 고민을 할때면 주위 사람들은 '또 그런다'라고 말한다. '누군들 찾고 싶지 않아서 그러나. 답답한 마음이야 나보다 더할까.' 이제는 이 고민에 잠못 이룬 밤이면 나는 '나 답다'라는 생각을 한다. 여기서 '뭐뭐 답다'라는 말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성질을 제대로 발현해내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한다는 문제는 차처하고라도, 지금의 나는 나답다.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이 '삶을 삶답게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인간의 탄생과 함께 자연스럽게 그러해야만 하는 필연적 당위 말이다.

 

혹자는 죽음이 있어 삶이 아름답다 말하고, 또 다른 혹자는 인간의 유일한 목적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게 인생이라고도 말한다. 누구에겐 아름답다가 누구에겐 슬프디 슬픈 그곳이 이 생이고, 삶이다.

기쁨과 슬픔처럼 반의어이자 얽히고 설킨 순환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삶과 죽음은 우리 삶에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가 된다.

 

하지만 현 삶을 살아가는 한낱 미물 인간에게 있어서, 보통 죽음은 저 하늘에 떠있는 구름 뒤의 이야기 쯤이나 되고 만다. 잠시 쉬고자 고개를 쳐들면 죽음이 바로 코 앞에 당도하리라는 사실을 모두들 알지만, 당장의 '먹고사니즘'에 빠져, 자본주의 '물질문명'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들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우리 답게, 바로 인간답게 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라는 말을 했다. 빅터E. 프랭클은 '호모 페이션스(Homo patience, 인내하는 인간)의 가치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보다 더 높다'고 했다.

삶(죽음)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인간의 성질은 본성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가 시대를 너머 형식(소설, 희곡, 수필, 시 등의 문학뿐 아니라 영화, 학문 등에서 )을 너머 회자되는 건 당연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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