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BookReview

내 본질의 냄새(feat.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olivi 2021. 7. 30.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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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에 내가 듣는 팟캐스트에서 소설 《향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 관심이 생겨 책을 사 두었다. 그런데 이번 주 도서관 글쓰기 수업 과제가 ‘단 하나의 감각’이어서 어서 읽어보라는 하늘의 계시마냥 후딱 읽어 내려갔다.

 

냄새에 대한 참신하고도 섬세한 묘사로 장편의 글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며 읽었다. 냄새를 ‘가닥, 조각, 덩어리’ 등과 같은 단위 표현이며 ‘양탄자, 불꽃, 술’ 등 시각적으로 표현할 뿐 아니라 ‘고요, 습격, 공포’등과 같은 청각과 촉각적으로도 표현해 내고 있었다. 글을 작성하는 데에 있어서 묘사는 과도한 미사여구에 불과하다며 최대한 덜어 내야하는 것 쯤 으로 치부하고 있었는데 이런 글을 쓸 때에는 언어의 연금술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작가 쥐스킨트 소설 속 주인공 그루누이처럼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책이 1985년에 출간되어 49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고 2천만 부 이상 팔려 나갔을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수상과 인터뷰를 거절하고 사진 찍히는 일조차 피한다고 한다. 글을 씀으로서 존재하고 싶지만 그 존재를 타인에게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진 않은 사람인가 보다.

 

모든 글은 그 사람을 나타낸다. 그루누이가 오를레앙으로 향하는 길에서 이제 막 획득한 자유의 호흡을 만끽하고자 인간의 악취에서 벗어나 동굴에서 7년 동안 사는 부분이 나온다. 주인공이 동굴로 향하고 그 곳에 사는 모습이 소설 속에서 가장 작가의 내면세계가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우리를 짓눌러 왔던 사람들의 냄새 덩어리에서 빠져나와 동굴이라는 냄새의 고요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만들고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발견하게 된다. 그루누이가 냄새로 가득한 본인의 세상을 만들고, 본인은 냄새를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듯이 말이다. 향수라는 묘사와 스토리가 가득 찬 소설에서도 작가는 그의 내면세계를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 나도 형식, 종류와 무관하게 모든 글안에서든 우주 같은 나만의 장소를 창조해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면 좋은 문구/

글 중간 중간에는 마음에 드는 묘사 표현뿐 아니라 생각해 보면 좋을 문구들도 있다.

 

인간의 냄새는 마치 배설물의 악취처럼 끔찍스러웠다. 그럴 때면 그는 더 멀리 도망을 쳤다. 점점 더 뜸하게 나타나는 인간의 냄새에 더욱더 더 예민한 반응을 보이면서 말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p.186

 

모든 냄새가 가득한 곳에 있으면 인간의 코는 악취 속에서 적응을 한다. 그러나 깨끗한 공기에 익숙해지면 미세한 악취에도 민감해진다. 그래서 어느 시대나 야인들이 소나무처럼 독야청청하나보다. 나의 삶에 대한 고민도 익숙해지면 안 될 터인데⋯⋯.

 

 

그러나 모든 인생사가 다 그렇듯이 이미 완성된 작품은 벌써 나를 지루하게 만든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p.200

 

흔히 남녀 사이에서 회자되는 ‘어망의 물고기’ 표현은 이미 유명하다. (예술)작품을 만듦에 있어서 이런 자세는 새로운 작품을 계속 만들어 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물고기를 낚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는지는 상관없이 오색찬란한 물고기를 낚으면 한참을 어망만 바라볼 것 같은데, 위에서 알아보았듯 인간의 적응력이야 다시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새로운 것, 참신한 것만 찾는 시대에 지루한 보통사람은 참 세상 살아가기 힘이 든다.

 

이 외에도 마지막 부분, 그루누이가 성공한 향수를 뿌리고 대중앞에 들어서면서부터 소설이 끝나는 부분까지는 내용이 역설적이어서 두 세번 읽게 된다.

 


 

소설을 읽으면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의 죽음'이 나온다. 첫째는 그루누이와 연관된 사람들의 죽음, 둘째는 그루누이가 향수를 만들기 위해 죽이는 죽음 그리고 셋째는 그루누이 본인의 죽음이다.

 

 

/그루누이와 연관된 사람들의 죽음/

아기 그루누이를 여덟 살이 될 때까지 길러준 보모, 가이아르 부인은 감각이 무감각하여 그루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공평함을 가지고 대했다. 하지만 양육비가 끊기자 일주일만에 무두장이에게 그루누이를 파는 데 그녀는 시립병원에서 죽지 않기 위해 보모일을 하며 악착같이 벌지만 전쟁으로 돈은 휴지가 되고 92세에 식도암에 걸려 그녀가 원치 않았던 시립병원에서 죽게 된다.

15살까지 그를 길러준 무두장이 그리말은 말을 안 듣는 경우 사람을 때려죽일 수도 있는 짐승같은 사람이었다. 나중에 향수 제조사가 그루누이를 도제로 사갔을 때 밤에 술을 많이 마시고 발을 헛딛어 센 강에 빠져 죽고 만다.

18살까지 그를 길러준 향수 제조사 발디니는 그루누이의 능력을 본인의 능력인 양 사람들에게 속여 많은 돈을 벌게 된다. 6백가지의 향수 제조법을 그루누이가 써 주시만 그에게 경건한 혐오감을 가지고 헤어질 때조차도 손을 내밀지 않는 자였다. 그는 교각이 붕괴되면서 다리 위에 있던 그의 집이 무너져 내리면서 죽게 된다.

동굴에서 무취의 자신을 발견한 그루누이가 생명의 유동체 이론을 주장하는 후작과 함께 몽펠리에에 함께 있으며 그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가 되어준다. 생명은 땅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때에만 발전할 수 있다는 사이비 같은 그의 이론을 그가 입증하듯 피레네 산맥의 초고봉을 향해 겨울바람을 맞으며 옷을 다 벗고 눈보라 속으로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그와 연관된 사람은 향수의 도시 그라시에서 숙식을 제공해준 향수 작업실에서 선임 도제로 만난 드뤼오이다. 그는 처음 도제로 만나 향수 작업실의 미망인이 그와 결혼하면서 그루누이에게 온갖 향수 제조하는 일을 시킨다. 나중에 그루누이의 죄를 덮어쓰고 사형 당한다.

이들의 죽음은 사랑이라고는 알지 못하는 주인공 그루누이의 영향으로 보인다. 모든 인간에게 나는 특유의 냄새가 없는 존재인 그루누이를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 그 특이한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죽임으로서 보여준다.

 

 

/그루누이가 향수를 만들기 위해 죽이는 죽음/

먼저 그루누이가 향수를 만들기 위해 죽인 사람들말고 14~15살 즈음 어떤 소녀를 죽이는 게 나온다. 빨간 머리의 자두를 까는 소녀는 그루누이가 처음으로 황홀하게 맡은 사람 냄새이다. 그루누이가 그 냄새를 가까이에서 맡으려다 의도치 않게 소녀를 죽이게 된다. 이 소녀는 향수를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죽임은 아니라는 점이 다른 경우와 다르다.

 

무취의 그루누이는 자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스물다섯 명의 사람들을 죽인다. 모두 결혼 전의 소녀인데 왜 스물다섯 명이어야 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원래 그루누이가 향수의 도시 그라시에서 그가 만들려고 했던 인간 냄새 향수의 극치는 ‘로르’라고 하는 소녀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향기의 소유는 곧 그 향기의 상실이라는 대가를 깨닫고 상심에 빠졌을 때 향기를 원래 상태 그대로 사용해서 낭비할 필요가 없다며 원석을 가공하여 여러 명의 사람을 살해할 것을 암시한다. 그루누이는 사람을 죽이는 데에 어떠한 마음의 동요가 없다. 그는 자신의 냄새를 갖지 못한 것만큼 죽음에 대한 감정 또한 없는 사람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인간 냄새의 향수를 뿌리고 대중 앞에 섰을 때 아버지, 어머니, 하느님도 아닌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 고마워할 뿐이었다. 살인자들의 통계를 보면 정신착란자보다 나르시시즘을 가지고 있는 자아도취자가 월등히 많다고 한다. 그루누이가 딱 그런 사람이었다.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예술가(전문가)가 본인의 행복(이기)을 위해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다수의 행복을 위한 공익차원의 목적을 위해 소수의 죽음을 수단으로 삼을 순 있을까? 본인의 생명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생명 또한 소중하다. 본인의 소신으로 무엇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조장해서는 안 되지만 인정할 순 있어도, 무엇을 위해 죽임 당한다는 것은 있어서는 절대 안되겠다.

 

 

/그루누이 본인의 죽음/

죽음에 대한 무감정은 그루누이 본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죽음은 정말 드뤼오의 죽음만큼이나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그가 인간 냄새 향수를 성공한 뒤 느낀 두려움, 증오에 대해 필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성공적으로 제조하게 된 향수로 인하여 사람들은 그루누이를 경외하며 사랑하게 되는 데 그는 그 승리 속에서 만족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 향기를 사랑하기는커녕 증오했다. 남들은 맡지 못하는 그의 무취를 그는 대중 속에서 맡으며 질식할 것 같아 정신을 잃고 만다. 그는 사랑이 아니라 증오하고 증오 받는 것 속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향수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지만 그 향수를 느낄 수 없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가 원한 것은 향기였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그의 향기가 아니라 ‘그’라고 생각했다. 모순과 역설 속에서 드러나는 본질을 마주하며 그루누이는 증오를 죽이기 위해 그가 죽음으로서 모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향수의 과다사용으로 그루누이는 사람들에게 뜯기고 먹히게되는데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이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고 말하며 소설은 끝난다. 사랑과 증오에 대한 아이러니를 생각해 보게 되는 문장이다.

그루누이가 그 향기를 증오한 이유가 자신의 본질을 가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느끼지만 역설적으로도 본인의 죽음으로서 이를 승화하고자 함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무취의 그를 두려워한 사람들이, 황홀한 향기에 뒤덮인 그를 사랑한 사람들이, 그의 본질을 몰라봤던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먹어치운 후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느낀 것은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본질을 알았다면 보통 사람들이 느낄 죄책감과 두려움, 증오감에서 비롯된 행동이라 생각했을 것인데 본질을 몰랐기에 그와 반대로 생각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덮으며

/앞으로 어떻게 글을 써볼 것인가/

그루누이는 단순히 남들과 다른 특이한 사람의 존재가 아니라 악마와 같이 신격의 존재로 나온다. 후각이 다른 모든 감각을 대체할 수 있는 정도가 신의 정도이니 말이다. 해결이 곤란한 결정까지도 후각을 통해 그 시기를 알 수 있다는 점이 참 매력적이었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 넓지 못한 내가 한없이 부족하게 느껴졌는데 의도적으로라도 세상만사를 제쳐두고 시야를 좁혀 내 감각에만 집중하고 글을 써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의 향기/

그루누이가 사람들을 향기로 묘사하는 부분에서 ‘나에게는 어떤 냄새가 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의 살 냄새는 어떤 좀 냄새를 풍기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나는 나에게 익숙한 내 냄새에 안정감을 느낀다. 그러나 진화학과 유전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은 자기 가족의 냄새를 사랑하진 않는다고 한다. 근친상간을 막기 위함이다. 자신가족과 다른 냄새를 가진 사람에게 끌린다는 게 신기하다.

그루누이가 자신이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 하는 이미지로 다양한 향수를 만들어 내는 부분에서는 ‘나는 어떤 향기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은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됐다. 예전에는 빵 냄새와 종이책 냄새가 나에게 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변치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지금은 빵을 거의 만들진 않지만 여전히 한 끼를 빵으로 때우고 있고, 갓 구운 고소한 빵 냄새를 여전히 사랑한다. 책은 말해 무엇하랴. 여전히 내 곁에 고소한 빵 냄새와 나무, 흙, 풀 냄새가 섞인 종이냄새가 함께 하길 바란다. 이들이 내 본질의 냄새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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