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사실 속 단상

[과거투자광풍에서 배우기]:Ⅱ.영국 남해회사

olivi 2021. 6. 24.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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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남해 거품 사건은 프랑스의 미시시피 계획과 네덜란드의 튤립 버블과 함께 "근대 유럽의 3대 버블" 경제의 비유로 알려져있다. 그 중 두번째 버블, 남해 거품에 대해 알아보자.

 

대중의 미망과 광기

저자 찰스 맥케이

출판 필맥

발매 2018.06.15.

 

 

1711년 영국의 재무장관인 옥스퍼드 백작 할리(Harley)가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를 설립했다. 여기에서 남해는 당시 남아메리카 대륙과 그 인근의 섬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 무리의 상인들이 남해회사를 통해 정부채무를 떠안는 대신에 정부가 매년 6퍼센트의 이자를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즉, 남해회사는 당시 위기에 빠진 영국 재정을 살리고자 설립되었다.공공 부채 정리를 위해 정부는 이자를 지급할 재원을 마련해 준다. 각종 무역에 관세를 부과하고 무역 독점권을 부여해 준다.

남해회사의 야심찬 계획, 페루와 멕시코의 금광과 은광에 관한 소문, 매장량이 엄청나다는 믿음, 스페인의 영국 무역선 입항 허용 할 것이라는 소문 등이 퍼지면서 설립초기부터 남해회사의 주식은 큰 인기를 끌었다. 실제로 스페인과의 계약은 무역이윤의 1/4는 스페인 국왕이 차지하고, 나머지 3/4는 5퍼센트의 세금을 부과한다는 내용으로 체결되었지만 대중의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다.

 

행운의 나무를 오르는 사람들(남해회사 거품 풍자한 그림)p.44

 

1717년에는 영국 국왕의 국가채무 축소 방안 마련 요구에 따라 남해회사는 자본금을 늘리겠다는 제안을 하였고 이는 의회에 받아들여진다.

 

위키백과에는 남해회사가 노예무역을 주된 목적으로 설립된 특권 회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무역이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스페인이 인정한 무역량이 영국이 필요한 양만큼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1718년에는 스페인과 영국이 전쟁을 하기시작하여 무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영국인 저자 찰스 맥케이가 설명하지 않은 부분이 나와있다.

 

저자가 영국인이라서 인정하지 않은 것인지 이유야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남해회사가 남아메리카를 대상으로 한 무역에서 별로 수익을 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금융측면에서는 계속 번창했다. 남해회사의 영향력을 확장할 방법을 궁리할 때 존 로의 미시시피 계획이 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 존 로의 미시시피 계획이 궁금하다면 아래 제 티스토리 포스팅을 참고하세요)

https://olivirainbow.tistory.com/67

 

[과거투자광풍에서 배우기]:Ⅰ. 미시시피 계획(Compagnie du Mississippi)

프랑스의 미시시피 계획은 영국의 남해 거품 사건과 네덜란드의 튤립 버블과 함께 "근대 유럽의 3대 ...

blog.naver.com

 

 

1720년 1월 22일 남해회사의 국가채무 해소 방안이 의회에 제출됐고 의회가 그 제안을 검토하기 시작하자 남해회사의 주가는 2배 이상 뛰어올랐다. 1주당 가격은 1720년 1월에 100파운드였던 것이 한때 400파운드 가까이 올랐고 법안이 통과된 4월 7일에는 330파운드였다. 의회에서는 월폴(Walpole)경만 주가 폭등이 초래할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그러나 경고를 귀담아듣는 사람은 없었고, 주가는 5월에 700파운드, 6월에는 최고치 1,050파운드까지 치솟았다.

 

이런 상승기조에 편승하여 당시 허가제였던 주식회사들이 정부의 허가없이 난립하기 시작했다. 이런 주식회사들은 곧, '거품회사(Buble)로 불리게 됐다. 일부는 1,2주 만에 사라졌고 이보다 더 수명이 짧은 주식회사도 적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부가 규제에 나섰다. 6월 11일에는 의회가 위험성을 경고했고 국왕도 불법적인 사업계획은 처벌받을 것이고, 그런 사업 관련 주식거래는 금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투기꾼들은 대중을 선동하기 멈추지 않았고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7월 12일에 거품회사 해산 법령이 발표되면서 시장은 진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 때부터는 모든 주가가 폭락하는 위기에 빠졌다.

 

남해회사 이사들은 주가 반등을 위해 대리인들을 통해 대규모로 주식을 사들이게 하고, 대중들의 신회가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주주총회를 열기도 했으나 주가는 떨어졌다. 9월에는 남해회사 이사들이 영국은행 이사들과 함께 회의를 가졌는데 이와 관련해 영국은행이 남해회사의 채권 발행에 동의했다는 소문이 나서 주가가 반등했다. 은행은 남해회사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으니 곤경에 빠진 남해회사를 구해야한다는 여론에 따라 월폴 경이 계약의 초안을 급히 작성해 영국은행이 그것을 받아들임에 따라 대중의 공포가 누그러졌다.

 

사진: 남해회사를 설립한 옥스퍼드 백작 할리(좌), 남해 거품 수습한 월폴(우) p.42

 

 

남해회사의 채권 발행을 위한 공모계좌가 영국은행에 개설된 날 오전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그날로 공모가 마감될 것 같았으니 오후가 되면서 분위가 바꼈다. 남해회사의 주가가 급락하고 채권의 신뢰도가 추락하면서 너도나도 주식과 채권의 현금화를 시도했다. 이에 일부 금융업자들은 가게 문을 닫고 숨었고 사람들은 영국은행으로 몰려갔다. 현금을 지불해주던 영국은행도 남해회사가 대중의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고 보고 더이상 계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남해 거품의 붕괴로 국가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영국 여러 도시 집회에서 남해회사 이사들의 사기행각을 처벌해달라는 청원서가 채택됐고, 상하원도 남해회사 이사들에게 중벌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몰스워스 경은 그들을 고대 로마의 선례를 따라 그들을 자루에 넣어 템스 강에 던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월폴 경의 입장은 보다 온건했다. '런던 시에 불이 나면 방화범을 잡는 것보다 불을 끄는 것이 먼저'라며 국가과 금융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했다.

 

재정 전문가 로버트 월폴은 남해회사 거품의 진상을 밝혀줄 남해 회사 회계 과장 로버트 나이트가 잠적하고 벨기에서 체포되지만 다시 탈옥하는 혼란 속에서 사태 수습을 한 인물이다. 위키백과에서는 그의 수습을 남해 거품 사건의 처리 방침을 확정해 경제가 다시 회복 궤도에 올랐지만 정치적으로 책임져야 할 사람에 대해 느슨한 조사를 해 뇌물을 받은 장관과 남해 회사 이사들을 감싸는 발언을 반복했다고 나와있다. 현 정권이 뒤집히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안좋다는 판단하에 엄격한 추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후 월촐은 당시의 국왕 조지 1세의 큰 신뢰를 얻게 되어 이후 제1 경제 수장으로 1742년까지 정권을 잡고, 영국의 의원 내각제의 기초를 쌓아올리게 된다.

 

정부의 부채를 한 기업의 탄생과 과도한 권력부여로 해결하려고 했던 영국 정부의 사고가 먼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돈이라면 예나 지금이나 물불 안가리고 달려드는 대중의 광기가 무섭다.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남해회사 이사들이지만 이들에게만 죄를 추궁하며 강에 시신을 던지자는 말은 무모하기 짝이 없다. 또한 사태를 수습한 월폴에 대한 인식이 저자와 위키백과가 달라 무슨 일이든 여러 의견을 들어봐야 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남해회사를 설립한 옥스퍼드 백작 할리는 날카롭고 거품을 수습한 월폴 경은 온화한 초상화를 가져온 것도 실제로 이들이 이렇게 생겨서인지, 저자의 뜻인지 의심스럽다.

 

 

[남해 거품 관련 유명인이 있다!]

 

뉴턴의 '중력의 법칙'
헨델

중력의 법칙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과학자 아이작 뉴턴은 남해 회사 주식으로 7,000파운드를 벌었지만, 이후 폭락으로 20,000파운드릐 손해를 봤다. 뉴턴도 주식으로 손해를 봤다는 말이 남해회사 거품 사건에서 나온 말이었다. 한편, 작곡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남해 주식 매매고 얻은 이익으로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자신의 음악 활동의 거점을 삼았다고 한다. (참조: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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